술탄 무라드 2세

2019년 3월 14일

술탄 무라드 2세

그는 술탄 무라드 2세로, 내부 반란을 진압하고 바르나 전투에서 십자군 연합군을 격파한 금욕주의 술탄입니다. 그는 전능하신 신을 숭배하기 위해 두 번이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유일한 술탄입니다.

그의 양육
술탄 무라드 2세는 806년(서기 1404년)에 태어나 오스만 제국의 한 가문에서 성장했습니다. 그 가문은 아들들에게 지식에 대한 사랑과 알라를 위한 지하드에 대한 열정을 심어주었습니다. 술탄 무라드 2세는 건전한 이슬람 교육 환경에서 자랐고, 그 덕분에 18세에 술탄으로 즉위할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그는 모든 신민들에게 경건함, 정의, 그리고 연민으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알라를 위한 지하드와 유럽 전역의 사람들을 이슬람으로 부르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술탄국을 점령하고 내부 반란을 진압하다
술탄 무라드 2세는 아버지 메흐메드 첼레비가 서기 824년/서기 1421년에 사망한 후 국가 통치권을 넘겨받았습니다. 술탄 무라드는 오스만 제국의 적들이 지원한 삼촌 무스타파가 일으킨 내부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비잔틴 황제 마누엘 2세는 술탄 무라드가 겪게 된 음모, 음모, 문제의 배후에 있었습니다. 그는 무스타파가 갈리폴리를 포위 공격하여 술탄에게서 빼앗고 자신의 근거지로 삼을 때까지 술탄 무라드의 삼촌을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술탄 무라드는 삼촌을 체포하여 교수대에 올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누엘 2세 황제는 술탄에 대한 음모를 계속 꾸몄고 무라드 2세의 형제를 받아들여 아나톨리아의 니케아를 점령한 군대의 지휘를 맡겼습니다. 무라드는 황제를 향해 진군하여 그의 병력을 격파하고, 적군을 항복시킨 후 전사했습니다. 이후 무라드 술탄은 황제에게 실질적인 교훈을 주기로 결심하고, 살로니카를 재빨리 점령하고 공격하여 1431년 3월(서기 833년)에 무력으로 진입했습니다. 살로니카는 오스만 제국의 중요한 영토가 되었습니다.
술탄 무라드 2세는 발칸 반도의 반란 세력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고 있었으며, 그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오스만군은 왈라키아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하여 매년 조공을 바쳤습니다. 세르비아의 새 국왕 스테판 라자르는 오스만 제국에 복종하여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술탄에 대한 충성심을 새롭게 다졌습니다. 오스만군은 남쪽으로 진군하여 그리스에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 기반을 공고히 했습니다. 술탄은 곧 선교 활동을 계속하여 알바니아와 헝가리에서 장애물을 제거했습니다.

그의 정복
무라드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은 834 AH / 1431 AD에 알바니아를 정복하고 공격을 국가 남부에 집중했습니다.오스만 제국은 북부 알바니아에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으며, 북부 알바니아인들은 알바니아 산악 지역에서 두 개의 오스만 군대를 격파했습니다.또한 그들은 무라드 술탄이 직접 이끈 두 번의 연속적인 오스만 원정을 격파했습니다.오스만 제국은 철수 중에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기독교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에 맞서 알바니아인들을 지원했는데, 특히 베네치아 정부는 오스만 제국이 이 중요한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야기되는 위험을 알고 있었습니다.이 지역은 해변과 베니스를 지중해와 외부 세계로 연결하는 항구가 있었습니다.오스만 제국은 또한 오스만 제국이 폐쇄된 아드리아 해에서 베네치아 선박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따라서 무라드 술탄 2세는 알바니아에서 안정적인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보지 못했습니다.
헝가리 전선에 관하여, 무라드 2세는 842 AH / 1438 AD에 헝가리군을 격파하고, 70,000명의 병사를 포로로 잡고, 여러 위치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정복하기 위해 진군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곧 교황의 축복을 받아 대규모 십자군 동맹이 결성되었는데, 그 목표는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동맹에는 교황청, 헝가리, 폴란드, 세르비아, 왈라키아, 제노바, 베네치아, 비잔틴 제국, 부르고뉴 공국이 포함되었습니다. 독일과 체코 군대도 동맹에 가담했습니다. 십자군 군대의 지휘권은 유능한 헝가리 사령관인 요한 후냐디에게 주어졌습니다. 후냐디는 십자군 육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진군하여 다뉴브 강을 건너 846 AH / 1442 AD에 오스만 제국에 두 번의 큰 패배를 안겼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평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기 848년/서기 1444년 7월, 슈체친에서 10년간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에서 그는 세르비아를 할양하고 게오르기우스 브란코비치를 세르비아의 왕자로 인정했습니다. 무라트 술탄은 또한 왈라키아(루마니아)를 헝가리에 할양하고, 오스만 제국군 총사령관이었던 사위 마흐무드 첼레비의 몸값을 6만 두캇으로 지불했습니다. 이 조약은 오스만어와 헝가리어로 작성되었습니다. 헝가리의 국왕 라디슬라스는 성경에, 무라트 술탄은 쿠란에 맹세하여 조약의 조건을 명예롭고 충실하게 이행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술탄국의 퇴위
무라드는 유럽의 적들과 휴전을 마치고 아나톨리아로 돌아왔습니다. 아들 알라 왕자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는 세상과 왕국을 버리고 술탄 자리를 당시 열네 살이었던 아들 메흐메드 2세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지혜롭고 사려 깊은 그의 부왕은 그를 자신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로 둘러싸게 했습니다. 그 후 그는 소아시아의 마그네시아로 가서 여생을 은둔과 평온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나라 지역에 안전과 평화가 확립되었음을 확인한 후, 이러한 은둔 생활 속에서 신을 예배하고 신의 왕국을 묵상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술탄은 이러한 고립과 예배를 오래 누리지 못했습니다. 체사리니 추기경과 그의 일부 보좌관들은 오스만 제국과의 조약을 파기하고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을 추방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특히 술탄 무라드가 오스만 제국의 왕좌를 경험이나 위험이 전혀 없는 어린 아들에게 물려준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랬습니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이러한 사탄적인 생각에 설득되어 기독교인들에게 조약을 파기하고 무슬림을 공격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에게 무슬림과 체결된 조약은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의 허가 없이 체결되었기 때문에 무효라고 설명했습니다. 체사리니 추기경은 매우 활동적이었고, 항상 이동 중이었으며, 오스만 제국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데 지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 왕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을 방문하여 무슬림과의 조약을 파기하도록 선동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설득하여 조약을 파기하게 하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교황의 이름으로, 교황은 조약 파기에 대한 그들의 책임을 면제해 주시고 그들의 군인과 무기를 축복합니다. 그들은 교황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광과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양심에 갈등을 느끼고 죄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든 자신의 짐과 죄를 짊어질 것입니다."

십자군은 언약을 어긴다
십자군은 계약을 파기하고 무슬림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으며, 무슬림이 해방시킨 흑해 연안에 위치한 불가리아 도시 바르나를 포위했습니다.계약 파기는 이 종교의 적들에게 공통적인 특징이기 때문에 전능하신 알라는 무슬림에게 그들과 싸울 의무를 부여했습니다.알라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그러나 그들이 계약 후 맹세를 파기하고 너희 종교를 공격한다면, 불신앙의 지도자들과 싸우라. 사실, 그들에게는 맹세가 없다. 어쩌면 그들은 포기할지도 모른다.} [아트-타우바: 12]. 그들은 항상 그랬듯이 계약이나 합의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약점을 감지하는 모든 국가, 모든 사람을 공격하고, 죽이고, 학살합니다.

지하드로의 복귀
기독교인들이 오스만 제국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하고 에디르네의 무슬림들이 십자군의 진격 소식을 듣자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정치가들은 술탄 무라드에게 전갈을 보내 이 위협에 맞서 싸우라고 촉구했습니다. 무자헤딘 술탄은 은둔 생활에서 벗어나 십자군의 위협에 맞서 오스만 군대를 이끌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무라드는 제노바 함대와 협상하여 십자군 함대의 감시와 감시 아래 오스만 군대 4만 명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송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 대가로 병사 한 명당 1디나르를 받았습니다.
무라드 술탄은 진군을 서두르며 십자군과 같은 날 바르나에 도착했습니다. 다음 날, 기독교군과 무슬림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무라드 술탄은 적들이 파기한 조약을 창 끝에 달아 그들과 온 천지에 그들의 배신과 침략을 증언하게 하고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발악했습니다. 양측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종교적 열의와 지나친 열정으로 기독교군이 거의 승리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호와 지나친 열정은 오스만 제국의 지하드 정신과 충돌했습니다. 계약을 파기한 라디슬라스 왕은 계약을 지킨 술탄 무라드와 정면으로 맞섰고, 두 사람은 격돌했습니다. 1444년 11월 10일, 848년 라자브 28일에 두 사람 사이에 끔찍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무슬림 술탄은 기독교인 헝가리 왕을 죽였습니다. 그는 창으로 강력한 일격을 가해 그를 기습 공격했고, 그로 인해 그는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무자헤딘 중 일부가 달려들어 그의 머리를 베어 창에 꽂아 영광과 기쁨을 표했습니다. 무자헤딘 중 한 명이 적에게 "오, 이교도들이여, 이것이 너희 왕의 머리다!"라고 외쳤습니다. 이 장면은 기독교 군중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고, 그들은 공포와 공황에 휩싸였습니다. 무슬림들은 그들에게 강력한 공격을 가하여 그들을 흩어지게 하고 참혹한 패배를 안겨주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등을 돌리고 서로 밀쳐냈습니다. 술탄 무라드는 적을 추격하지 않고… 이것이 승리의 정도이며, 위대한 승리입니다.
이 전투로 인해 헝가리는 앞으로 최소 10년 동안 오스만 제국에 대한 공격적 군사 작전을 펼칠 수 있는 국가 목록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고립과 헌신으로의 복귀
무라드 술탄은 이 세상에서나 왕국에서나 금욕주의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왕위를 아들 무함마드에게 물려주고, 마치 굴로 돌아가는 승리한 사자처럼 마그네시아에 은둔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역사는 왕위를 물러나 국민과 왕국의 영광에서 스스로를 떼어놓고 은둔 생활을 했던 왕과 통치자들의 사례를 우리에게 말해 왔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왕위에 복귀했지만, 술탄 무라드를 제외하고는 두 번이나 왕위를 물러난 사람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소아시아로 은둔 생활을 하자마자 에디르네의 예니체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폭동을 일으키며 격노하고 반란을 일으키고 부패했습니다.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젊은 나이였고, 일부 신하들은 사태가 악화되어 위험이 커지고 악행이 심화되어 결과가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무라드 술탄에게 직접 문제를 처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무라드 술탄은 와서 권력을 장악했고, 예니체리들은 그에게 복종했습니다. 그는 아들 무함마드를 아나톨리아의 마그네시아 총독으로 파견했습니다. 술탄 무라드 2세는 생애의 마지막 날까지 오스만 왕좌에 머물렀으며, 그 기간을 정복과 정복에 바쳤습니다.

무라드 2세와 시인, 학자, 자선에 대한 그의 사랑
무함마드 하르브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라드 2세는 시를 거의 쓰지 않은 사람이었고, 그의 시는 우리에게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문학과 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는 시인들에게 축복을 내려 일주일에 이틀씩 시의회에 초대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술탄과 그들 사이의 대화와 험담을 자세히 나누도록 했습니다. 술탄은 그들을 찬성하거나 반대하고, 선택하거나 거부했습니다. 그는 종종 궁핍한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거나, 그들이 삶의 걱정에서 벗어나 시를 쓰는 데 전념할 때까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줌으로써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그의 시대는 수많은 시인을 배출했습니다."
무라드 2세는 왕궁을 일종의 과학 아카데미로 탈바꿈시켰고, 심지어 시인들을 그의 투쟁에 동행하게 했습니다. 그의 시 중 하나는 "이리 와서 신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영원히 살지 않으니."였습니다.
그는 박식하고 현명하며 정의롭고 용감한 술탄이었습니다. 그는 매년 자신의 돈으로 3,500 디나르를 두 성지 사원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지식, 학자, 셰이크, 그리고 의로운 이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왕국의 길을 닦고, 도로를 확보하고, 법과 종교를 확립했으며, 이교도와 무신론자들을 굴욕시켰습니다. 유세프 아사프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경건하고 정의로웠으며, 강한 영웅이었고, 선을 사랑했으며, 연민과 자비를 베푸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무라드 술탄은 세 개의 발코니가 있는 에디르네 모스크를 포함하여 모스크, 학교, 궁전, 다리를 건설했습니다. 이 모스크 옆에는 학교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호스피스를 건설했습니다.

그의 죽음과 유언
술탄은 855년 무하람 16일(서기 1451년 2월 18일) 에디르네 궁전에서 47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신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길, 그는 부르사의 무라디예 모스크 옆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덤 위에 아무것도 세워지지 않도록, 무덤 양쪽에 암송자들이 앉아 꾸란을 낭송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달라고, 그리고 금요일에 안장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의 유언은 그대로 이행되었습니다.

우리가 위대했을 때
Tamer Badr의 저서 『잊을 수 없는 리더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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